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독버섯처럼 갑질 횡포가 만연해 지고 있다. 사회적·경제적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약자에게 부당 행위를 시키는 불법행위로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사회 구성원 간에 불신과 위화감을 조성하는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우리 경찰에서는 직장 내 갑질 횡포를 근절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갑질 횡포는 근절되지 않고 성행되고 있다. 또 갑질 횡포는 가해자· 피해자 간 이해관계로 인해 음성화되는 경향이 있어 경찰의 적극적인 홍보 및 피해자 보호 활동이 병행돼야 실질적 단속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존 단속 위주의 활동에서 벗어나 피해자 보호와 관련, 관계 기관과의 협업을 강화해 피해신고를 유도하고 적극적인 홍보와 자문 변호사 운영 등 피해자 지원 시스템 구축을 통해 실질적인 피해자 보호 활동이 병행돼야 할 것이다. 갑질 횡포는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루는 무한 경쟁체재와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형성된 잘못된 사회 현상으로, 나는 상대보다 우월적 위치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자 발현된 것이라고 한다. 갑질 횡포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주변의 사람들이나 나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차치명은 1873년 3월22일 충청남도 예산군 임성면 궁평리에서 태어났다.일제에 의해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한•일 신협약등이 체결되어 국운이 기울자 국권회복의 큰 뜻을 품고 의병에 투신하였다.그는 1907년 박재일이 의병을 모아 봉기하자, 자신의 재산을 군자금으로 헌납하고 공주, 천원, 홍성, 예산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같은해 8월13일 박재일 • 임봉래, 박성삼등과 함께 예산군 금평장등에 살던 서성화와 면천군 비방면 신리의 서광숙에게 각각 군자금 4원씩을 모금하고 화승총 1정을 노획하려다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1909년 3월 22일 공주지방법원 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56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치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주서 되었다.
친일세력 응징에 힘써 총독암살 시도 발각, 풍기 피신 박상진 만나 대한광복회 만들어 기사입력: 2015/07/06 [09:46]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김한종 의사(사진)는 1883년 1월 14일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번지에서 출생했다. 그리고 1921년 8월21일 대구 형무소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집행으로 순국했다. 1900년 2월에는 홍주의병에 참가한 부친 김재정의사를도와 홍주의병에 참가했으며,1916년 7월 조선총독이 부여를 시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조선총독을 처단하려는 것이 발각돼, 경북 풍기로 피신해, 채기중, 박상진의사와 함게 대한광복회를 만들었고, 군자금을 모아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워 국권을 되찾고, 친일세력을 응징해 나라를 되찾고자 했다. 김한종 의사의 부친은 홍주의병에 참여했고, 김재풍 의사는 김한종 의사의 삼촌으로 대한광복회가 국내의 소자산가들에게 고시문을 발송할 때 고시문에 날인할 인장을 직접새겨 김한종 의사에게 전달했으며, 김재창, 김원묵, 김재철,김재인, 김성묵 등은 군자금 모집시에 정보를 제공하거나 대한광복회 회원들이 활동할 때에 이들을 피신시키거나, 무기를 보관했다가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당시 40여호가사는 이 마을에
대한광복회 충청지도부 김한종 집안 중심 구성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일제 강점 초기 항거했던 김한종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下> 기사입력: 2015/07/13 [09:42]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김한종은 충청지도부를 확대하기 위해 친분이 있었던 장두환(농민, 대한 광복회 선전부장)을 가입 시켰으며, 그와함께 회원 모집을 시도했다. 김한종의 대한 광복회 충청지도부는 대부분 홍주의병에 참여했거나 내포문화권에 속하는 지역 인물들을 중심으로구성됐다. 특히, 김한종 의사의 집안을중심으로 예산 광시 신흥리 사람들이 대거 참여 했다. 당시 대한광복회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먼저 지역을 분할해 충남지역의자산가를 파악했는데, 김한종은 서산, 예산, 홍성, 보령 지역을 맡았다. 그 과정에서 군자금 모금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에게 신고하는 악질 친일파들이 있었다. 김한종은 그 중에서 도고면장 박용하를 시범적으로 다음과 같은이유로 처단하기로했다. “도고면장박용하는 통고문을 받고 이것을 헌병대에게건네주었을 뿐만 아니라, 박은 다시 부하면서기 가족을 거지와 같이 만들고 전 면장을 옥사시킨 악인이므로, 대한 광복회를 찬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연금을낼 리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일제 강점 초기 항거했던 수당 이남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上> 임금·나라에 대한 충성심 일세 풍미 사대부들 모범 기사입력: 2015/07/20 [09:45]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선생의 생존 연대와 관련되는 시대 배경을 살펴 볼 때, 수당이 출생하던 시기를 전후해서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안팎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안으로는 그가 출생하던 해인 1855년에는영남 유림들이 ‘만인소’를 올린 건의문형식의 상소를 했다. 그해 강원도 홍천에 러시아 배가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우리나라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오는 신호였던것이다. 그와 전후해 영국, 불란서, 독일,미국 등 서양 물결이 줄이어서 들어오게되는데 이 모두가 수당 선생의 출생연도 즈음해 일어난 일들이었다. 사회불안이 절정에 달해 조선 왕조 자체의 붕괴 조짐이 뚜렷해진 시기이기도했다. 농촌 경제 파탄으로 백성들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으킨 민란은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삼남지방 각지에서 매년 빈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1894년 동학농민 혁명이 발발하기에 이른다. 수당 선생은 이미 갑신정변 때에도 지켜보았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일제 강점 초기 항거했던 수당 이남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下> ‘홍주성 전투’선봉장 참여 기사입력: 2015/07/27 [10:04]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의병이란 다른 민족이 침략했을 때 나라를 위해 싸우는 민중을 말한다. 역사가 중에는 1895년 의병에서부터논의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1907년 해아사건이 있은 후 군대 해산이 있어 구 한국군인들이 일어나 서울·원주·강화 일대의 의병들과 합세해서 항쟁하게 된 때를 주시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주목돼야 할 것은 일본의 침략기구로서의 통감부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다. 이때 일본 제국주의 침략방지에 대해 최초로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항쟁을 벌인 의병은 충청도 홍주성(현재 홍성)에 근거를두고 싸운 의병이다. 일본 사령부에서 내놓은 책을 보면, 그전투에선 자기네들이 크게 손해 본 것을 되도록 감추려고 애쓰고, 또 되도록 축소하려고 하지만, 이미 서울에는 고문 경찰부가 설치돼 있었다. 이 고문 경찰부에서는 홍주성으로 군대를 배치했고, 경찰과헌병도 보냈다. 홍주 부근이나 공주는 물론 수원에서까지 보냈다. 그 때의 일본 기록에는 약 30여 명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5,6명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일제 강점 초기 항거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조선과 왕에 대한 충정의 삶 기사입력: 2015/08/03 [09:38]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면암 최익현 선생은 1833년 12월5일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했다. 면암은 6세때 한학에 입문, 14세 때 화서 이항노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았고, 그때‘면암’이라는 아호를 하사 받았다. 23세(1855.3) 명경과순통 합격 급제해 30세 신창 현감 인으로 임명돼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변암은 수 차례 관직에서 사직하려는 상소를 올림으로 개인의 영달을 죄 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장래, 일본인들의 궁내 출입과 국내 각종 정책들에 관여하는 모양에 환별을 느끼고 그에 대한 경계의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 간신들이 일본인들과결탁해 있었던 터라 그는 관직을 제수 받고도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그러다가 끝내 당시 오지였던 청양으로 이사해 의병들의 모임 장소가 될 만큼, 그곳에서의병 모임의중심 역할을 했다. 분명 임금과 신하가 존재했던 시기였지만, 일제와 간신들이 가득했던 당시 관료 사회에서 더 이상관료로서의역할을 수행할 수 없음의 한계를 인식.
<논단> 바뀐 것은 없다 기사입력: 2016/10/05 [13:04]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국회에서의 장관 임명동의안 거부로 촉발된 정기국회 여당의 “국정감사 전면 보이콧” 문제가 여당 대표의 “단식”에서, 단식 중단 선언으로 정기 국회 일정이 새롭게 짜여졌다는 것, 이외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생각해 보았다. 결국 정치의 주도권을 어느 세력이 주도해 가느냐에 대한 문제로 국회의 공전이 있었다. 거기엔, 민생에 대한 고려, 국방에 대한 우려, 외교에 대한 특별한 대응 등이 고려됐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미안했던지 국회에서 국정감사 일정을 연장한다는 정도의 대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참으로 다행이다”라고 입을 모으는 상황이 되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정치라는 것이 “정권 창출”에 있다고 하는데, 그마그만한 정치인들이 전부인 대한민국에서 선택의 폭이 아주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한 나라의 국민이 믿고 의지할 지도자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국민에 대해, 자신 가족의 안녕을 바라듯, 성실히 국정에 전념을 다하는 지도자가 과연 대한민국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대한민국
<기고>경찰을 병들게 하는 관공서추취소란 /오현미(예산경찰서) 기사입력: 2016/10/05 [13:05]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지구대·파출소에서 밤낮을 불문하고 24시간 근무하는 지역경찰관등에게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주취자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특히 술값시비나 폭행신고가 많은데 현장에 출동하면 술에 취한 상태에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욕설을 하고 심할 경우 폭행을 일삼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건처리에 불만이 있어서 술에 취한 상태로 다시 관공서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술에 취한 상태로 관공서를 방문하여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집에 들어가도록 타이르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경찰관에게 끊임없이 욕설을 하며 시비를 거는 등 행패를 부려 업무에 큰 지장을 주고 있다. 만취한 주취소란자의 난동행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평균 2~3시간 이상이 소요되고, 그 시간 동안 범죄 예방 순찰 및 정작 경찰관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시민들의 신고를 나갈 수 없는 치안공백의 상태가 된다. 관공서 등에서 술에 취해 행한 소란·난동 행위들이 자칫 정말로 필요한 곳에 집중되어야할 경찰
<기고>'안전’이라는 기본원칙을 바로 세우자 /김선태(예산소방서) 기사입력: 2016/10/05 [13:05]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소방인의 하루는 안전이라는 구호와 함께 시작하여 안전이라는 구호로 마무리된다. 상호간에 인사를 할 때도, 근무교대, 각종 현장 활동 시에도‘안전! 안전! 안전!’이라는 구호가 따라 붙는다. 2014년, 국민모두를 오열하게 했던 세월호사고, 최근 경주지역 지진 발생까지 크고 작은 사고발생으로 안전은 더 이상 소방서에서만 들을 수 있는 구호는 아니게 되었다. 언론은 취약한 안전관리의식과 재난안전 시스템의 불완전성에 대해 질타하고, 정치가들의 슬로건에서도 ‘안전’은 단골메뉴로 등장하지만, 곧 타성에 사로잡혀 잊혀 지면서,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사회곳곳에서는 공사현장에서의 추락사고, 질식, 교통사고 등 각종 재난현장에서의 매뉴얼 부재와 안전의식의 결여로 인해 귀중한 인명과 재산피해는 물론 국민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 이처럼 거듭되는 대형 화재와 사고 소식은 안전이라는 구호가 언급만 되고 있을 뿐 공허하게 메아리처럼 허공에서 흩어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 우리는 안전을 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