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사주지 범상스님 시인 수필가
수행이란 무엇일까?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하듯이 수행이란 전혀 특별하지 않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수행이며,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을 도라고 이름 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 도와 수행을 어렵다고 할까.
첫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특별한 능력을 얻는 것이라는 지레짐작과 착각이며,
둘째는 세속의 삶에서는 실천하기 어렵고 도달 할 수 없는 특별한 경지라는 생각이며,
셋째는 번번이 이성이 본성에 굴복 당한다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세 번째 문제를 해결하면 앞선 두 가지 문제는 자연 사라지게 된다. 수행 중에 으뜸은 보시이다. 흔히 보시라하면 일반적으로 상대에게 무엇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시를 실천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바꾸고 이롭게 하는 것으로 자기의 복과 덕을 쌓는 작복(作福)으로서 수행이다. 지난 호에서 말했듯이 모든 행위의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의 변화이고, 어떤 경우에도 상대는 두 번째가 되기 때문이다.
불교는 보시를 강조한다. 보시를 물질을 나누는 것, 바른 법을 가르쳐 주는 것, 일체의 두려움을 재거해 주는 것 등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문제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보시라는 말에서 베푸는 것이라는 관념이 떠오르는 것을 쉽게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뒤따르는 것이 ‘내가’ ‘무엇을’ ‘남에게’ ‘베풀어 준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말라는 무주상(無主相)의 가르침이다.
<잡보장경>에는 재미있는 보시 이야기가 나온다. 가난한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하소연 하였다. “나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며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베풀지 않았음이 원인”이라 하였다. 이에 자신은 가난하여 베풀 것이 없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돈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법을 가르쳐 주었다.
첫째, 항상 웃는 얼굴로 상대를 대하는 화안시(和顔施),
둘째, 항상 바르고 좋은 말을 나누는 언시(言施),
셋째, 항상 자비의 마음으로 남을 보살피는 심시(心施),
넷째, 항상 편안한 눈빛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안시(眼施),
다섯째, 항상 몸이 수고하여(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등) 남을 도와주는 신시(身施),
여섯째, 때와 장소에 맞게 자리를 양보하는 좌시(坐施),
일곱째, 항상 상대의 마음을 살펴 원하는 것을 미리 도와주는 찰시(察施)이다.
이 일곱 가지는 참으로 쉬워 보이지만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상대에게 베푼다는 생각과, 상대는 나에게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는데 나만 왜 그래야 되는가 하는 나와 남을 분별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네 보다 잘났다는 만(慢)이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런데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수행으로 삼으면 ‘나는 항상 웃는 사람이요’, ‘나는 항상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요’, ‘나는 언제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요’...,...결국 자기 자신이 ‘사람다운 사람’ ‘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부처’가 된다.
깨달음이란 나[行]와 대상[法]의 관계를 명확히 아는 것이다. ‘나 없는 대상’은 없고, ‘대상 없는 나’도 없다. 결국 나와 대상은 나누어질 수 없는 불리불가(分離不可)의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위에서 열거한 일곱 가지 외에도 무주상의 실천으로서 항상 베푸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잘사는 것’이며,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본다.
선거철에 접어든 요즘 일방적으로 상대를 공격하면서 자기 자신이 먼저 무너지는 어리석은 군상들을 본다. 자나 깨나 상대방을 공격하는 사람이 과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과 ‘함께 화를 낸다’의 주인공은 상대일까 자신일까 하는 부질없는 질문으로 나를 되돌아보는 하루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