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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

일제 강점 초기 항거했던 수당 이남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上>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일제 강점 초기 항거했던 수당 이남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上>
임금·나라에 대한 충성심 일세 풍미 사대부들 모범
기사입력: 2015/07/20 [09:45]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선생의 생존 연대와 관련되는 시대 배경을 살펴 볼 때, 수당이 출생하던 시기를 전후해서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안팎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안으로는 그가 출생하던 해인 1855년에는영남 유림들이 ‘만인소’를 올린 건의문형식의 상소를 했다. 

그해 강원도 홍천에 러시아 배가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우리나라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오는 신호였던것이다. 그와 전후해 영국, 불란서, 독일,미국 등 서양 물결이 줄이어서 들어오게되는데 이 모두가 수당 선생의 출생연도 즈음해 일어난 일들이었다. 사회불안이 절정에 달해 조선 왕조 자체의 붕괴 조짐이 뚜렷해진 시기이기도했다. 농촌 경제 파탄으로 백성들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으킨 민란은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삼남지방 각지에서 매년 빈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1894년 동학농민 혁명이 발발하기에 이른다. 수당 선생은 이미 갑신정변 때에도 지켜보았던 개화파의 일부 젊은이들이 일본과 결탁해 원로대신들을 함부로 타살해 과격한 행동을 할 때부터 선생은 나쁜인상을 가졌었는데 갑오동란을 핑계로왜군이 함부로 도심에 들어올 때부터 더욱 반일 사상을 갖게 됐다. 

왜군이 불법적으로 도심에 진주하고 보니 선생의 반일 사상은 갑신정변으로 소급하고 이어서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깊은숙원이 있는 것처럼 굳어졌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일본 제국의 침략을 폭로하고 그 죄상을 강조했다. 특히, 을미년 민왕후 시해사건 이후, 그 해 9월 수당 선생은 영흥부사의 관직을 내놓고 예산으로 내려와서 왜병의 만행을 규탄하고 민왕후의 위호를 복위하고 왜군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소문을올렸다. 남의 나라의 중전을 불법으로 침입해 왕후를 시해한 것은 천인이 공노할야만인의 행동이니 이를 묵과 할 수 없다고 말하고 하루속히 외무부에 명령해 왜국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그 죄상을 국제적으로 규탄케 해야 하며 왕은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광화문 앞에서 전 시민을 모아 거국적으로 이 땅의 적을 물리치자는 깃발을 들고 일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강하게 거부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선생의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청렴 강직한 성격은 일세를 풍미하며 사대부들의 모범이 됐다. 한말. 개화주의자들이 개혁의 수단으로 외세를 불러들였다가 결국은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매수당해 결과적으로 나라 일을 망치게 했던 사실을 두고 볼 때처음부터 외세와의 결탁을 철저히 거부한 선생의 태도는 단순히 개화를 반대하는 그의 보수적 입장만을 주장했다고 해서 시국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고 할지모르나 선생의 위정척사 사상이라든가동서사학을 배격한 것 등은 오늘날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충효 사상이요, 민족주체 사상이요, 자주 국방사상이라 할 것이다. 더구나 선생은 의병 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을 뿐 만 아니라. 항일 운동의 한 중심 지역 활동을 했고, 또 당시에있어서 선생의 행동은 사회에 큰 영향을미쳤던 것이므로 왜적은 마침내 납치 도중 살해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회유책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절개를 고수했고 끝까지 구국 일념에 살다가왜군의 잔인한 만행으로 일생을 마친 당대의 애국자요, 정치가로서 손꼽지 않을수 없다.     예산/김영돈기자

 

수당 이남규 생애와 삶
1855년 서울 출생
1868년 (14세 결혼)
1875년 사마시 (詞馬試)에 합격
1882년 (28세) 정시 문과에 합격
1883년 (29세) 승문원 권지부정자(관직)
1885년 (31세) 승문원 부박사
1886년 (32세) 성균관 서학 교수 사간원 정언
1887년 (33세) 모친상으로 예산에 옴
1891년 (37세) 사헌부 재직
1892년 (38세) 공조참의
1894년 (40세) 형조참의, 우승지, 영흥부사
1895년 (41세)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낙향
1896년 안동부 관찰사
1897년 중추원 의관
1899년 비서승, 함경남북도 안렴사 제수
1907년 일제에 의해 살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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