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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 오디세이

                               소설가 이재인교수

 

1, 외나무다리에서

 

늙은 개복숭아 나무가 비스듬히 누운 신작로 오른쪽

이었다. 파이프에 매달린 녹색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

다. '여기서부터 오르막길 조삼 이라는 하얀 명조체 글

씨가 경칩을 앞둔 봄바람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턱수염이 무성한 오십대의 운전기사는 목이 유난히

짧았다. 그 때문에 뚝심도 있어 보였다. 그는 끄르륵,

기어를 2단으로 바꾸었다 . 이내 새끼손가 락으로 콧속

을 후벼팠다

“이사를 축하합니다.”

서울에서 한 시간 오십 분이나 달려오면서도 용건 외

에는 허튼 말한마 디 꺼내지 않던 운전기사이다. 자못

과묵해 보이던 그가 별안간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로

이사를 축하한다니,무슨 영문인가 싶어 승구(千훙ft)가

뜨악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예산이라길래 종년 잡아먹은 개백정 같은 시굴인 줄

만 알았는디,이 산굽이가 천상 양곱창이 할아버지요,

또아리 튼 뱀이구려. 동네가 뱀삿골이라먼 참으로 요상

하게 생긴 징그런 시굴이네요 잉?’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어찌 보면 비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게 그런가요?’

승구는 일단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그는 금의환향이 아니었다. 같

잖은 개떡에 입천장만 데인바나 다름이 없는 신세로

서울에서 쫓기고 쫓기다가 밀려나듯이 귀향하는 길이

었다.

“ 조심하세요. 내리막길에다 커브가 워낙 심해 놔

서.....여기 댕기는 사람들 선거 때마다. 돈봉투 받아

먹구 꿀 먹은 벙어리 행세하느라고 길 닦을 생각은 일

찌감치 접어둔 게 분명해요.”

아내가 기우뚱,승구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커브를

돌 때마다 몸이 이쪽 저쪽으로 사정없이 쏠렸다. 운전

기사는 해바라기꽃 빛깔의 천을 씌운 핸들을 숙달된 자

세로 좌우로 조심스럽게 돌렸다.

“걱장 마십쇼. 이래봬도 지가 이십 년 무사곱니다. 생

긴 모양은 산적 하래비 같지만,말년 운수는 정주영이

찜쪄 먹는다는 말을 펀다하게 듣고 있습니다요.”

그는 의자 옆에서 황금색 비둘기 표지가 뚜렷한 남색

모범기사 모자를 꺼내어 머리에 가볍게 얹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 두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는 이십년 무사

고 운전기사답게 가파른 내리막길을 승구가 보기에 도

요령 좋게 내려갔다. 그러나 기관지 천식을 앓는가 싶

게 풀무숨을 쉬다가 그렁그렁한 가래침 뱉어내기를 반

복했다.

트럭에 실린 짐들은 세탁기와 냉장고를 비롯해 온갖

세간이 빈틈없이 쟁여져 있었다. 애초에 트럭 두 대를

불러야 할 살림살이였다= 그렇게 많은 짐의 안전을 위

하여 두 대의 차는 불러와야 한다고 아내가 조붓한 눈

꼬리를 치켜세우면서 몇 번이나 주장했었다. 그러나 승

구는 이사 비용을 아끼기 위해 그녀의 주장을 일방적으

로 묵살해 버렸다. 이삿짐이 깨지거나 흠집이라도 나게

되면 그 책임이 모두 승구한테 돌려질 것은 말할 나위

도 없었다.

서울생활에서 패배한 처지에 마치 금의환향이라도

하듯 이삿짐을 트럭 두 대에 나누어 싣고 가는 것 자체

가 승구는 싫었다. 화젯거리가 없어 입천장에 곰팡이가

슬기 십상인 시골 인심,남의 떡에 제사 지내듯 험담 좋

아하는 시골 사람들한테 두 대의 이삿짐 트럭은 입방아

정기에 중분한 사건이 아니겠는가.

그는 아내의 다짐은 아랑곳없이 한 대의 트럭에 짐을

싣도록 운전기사에게 귓속말을 해두었다. 팁을 넉넉히

생각해 줄 터이니 알아서 한 대로 짐을 해결해 주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트럭이 무거운 하중을 못이겨 잘못되

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내는 그를 책망할 것이고,그렇

게 되면 부부 싸움으로 비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지

만.

“이삿짐만 이십 년이 넘는 짤밥이니 맘 푹 놓으십시

오.”

운전기사의 자신만만한 말이 그의 불안을 조금이나

마 걷어냈다. 하지만 차체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승구는

손에서 진땀이 배어났다.

트럭이 대흥면 초입으로 접어들었다. 시야는 난데없

이 짙은 안개가 가로막고 있었다.

“어라,지랄하네. 웬 눔의 초상집 개 같은 안개여?’

운전기사는 미처 예상치 못한 안개에 적잖게 놀라는

표 정이었다. 그의 몽니 사납게 생긴 얼굴이 기상 악화

에는 흰자위를 크게 드러내면서 내내 소태 씹은 표정이

었다.

예당저수지. 바다처럼 넓은 저수지로 4개 면이 수

몰된 국내 서열 1위이다. 어떠한 가뭄에도 그 바닥을 드

러낸 적이 없다는 저수지였다. 그래서 허풍기 있는 이

동네 사람들은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낚시꾼을 불

러들일 때마다 ‘고기 반 물 반’ 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

는다.

“예는 아무튼 항상 안개 풍년이 에요.”

아내의 말투에는 불만이 잔뜩 묻어 있었다.

“걱정 마. 안개는 수분이 많아 미용에도 좋다잖아.”

“수분이 호홉기 에 장애가 된대요.”

그는 건강에 대한 아내의 그 진지한 상식에 곧잘 놀

라곤 했다. 그녀는 가족의 건강 생활을 위해 비타민 복

용법,생식 요법,채소 먹기,물 따로 밥 따로 먹기에

유난히 신경을 써 왔다. 그런 그녀가 안개에 대한 상식

에도 남다른 식견을 지니고 있다니,승구는 할말이 없

었다.

“여기 저수지 이름이 뭐죠?’

자기 말로 이십 년이나 트럭을 운전하면서 이삿짐을

싣고 전국 도처를 누비고 다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런 그가 국내 최대의 예당저수지를 모르다니….......

예당저수지는 1962년도에 축조되었다. 예산군과 당

진군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

름도 예당저수지이다. 중부권 최대의 낚시터이고,백제

부흥운동의 장수였던 흑치상치가 나당연합군에게 무

를을 꿇어 그 천추의 한이 서린 임존성이 바로 저수지

발치에 닿아 있다. 그 바람에 백제 유민들의 눈물이 고

여 오늘날의 예당저수지가 되었다는 억지향토 사학자

들도 심심찮게 나타났다.

“기사 양반,예당저수지를 모르신다니,섭섭합니다.”

혀를 차면서 하는 승구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운전

기사가 백미러를 힐끔거리더니 별안간 걸찍한 욕설을

퍼부었다.

“어라,시벌놈의 짭새 새끼잖아.”

“네?’

“경찰이 따라붙었다 그 말입니다.”

번쩍번쩍 경광등을 켠 순찰차가 트럭 뒤를 추격해 오

고 있 었 다 . 이윽고 순찰차는 경적을 길게 울리며 바짝

좇아왔다. 운전기사는 저녁 굶은 시어머니 얼굴로 눈을

지릅뜨면서 말했다.

“사장님,만 원짜리 한 장만 주십쇼.”

도리가 없었다. 승구는 호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

을 꺼내 건넸다. 운전석 옆에 앉은 젊은 경찰관이 오른

쪽 손을 허공에 쳐들어 흔들면서 정차 명령을 내렸다.

“개새끼들!”

운전기사는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웠다. 순찰차에서

내린 젊은 경찰관은 가볍게 거수 경례를 했다.

“제가 뭘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과적입니다. 짐을 너무 많이 실었군요. 면허증 좀 보

실까요?’

운전기사는 고개를 끄떡 였다.

“좀 봐 주세요. 새끼덜과 목구녁 풀칠헐라구 이 짓 헌

다우

운전기사는 만 원짜리 한장을 면허증이 들어있는

지갑에 얼른 끼워 넣었다. 면허증을 받아 든 경찰관이

섬뜩한 살쾡이 눈으로 만 원짜리를 꺼내어 운전기사의

턱밑으로 디밀었다,

“뇌물 공여에다 과적 위반으로 처리하겠습니다.”

“ 너무그러지 마십쇼. 저도 먹고 살아야죠. 제일 싼

걸로 한 장만 끊어 주십쇼.”

광대뼈가 튀어나온 젊은 경찰관은 트럭 앞에 당당하

게 버티고 섰다. 그는 딱지를 발급했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얼마짜린가요?’

“문딩이 콧구멍에서 마늘 빼먹을 놈덜이,양심은 있

능가,오늘은 웬일루 삼만 원짜리네요.”

비록 딱지는 끊겼을망정 기분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세상 많이 변했네요. 옛날 같으면 진흙묻은 똥강아

지 몰골로 라면값이라도 달라고 지들이 먼저 손을 내밀

었는데,이젠 만 원짜리도 본척 만척이네요.”

운전기사는 천천히 기아를 넣고 조심스럽게 악셀레

이터를 밟았다.

“이제 경찰도 자존심을 지키는가 보군요.”

아내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믄요. 사실 인간이란 자존심 때문에 사는 게 아

니겠어요.”

“아주머니는 직업이 선생님이시죠?’

운전기사는 깎지 않은 턱수염을 돌리며 아내에게 확

인하듯 물었다. 아내 대신 승구가 되물었다.

“이 사람이 정말 학교 선생님으로 보입니까?’

“풍기는 외모가 딱인데요. 중학교 가정과 선생님?’

아내는 버릇대로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히쭉 웃었다.

어이없다는 그런표정이 일순 미망처럼 스쳐 지나갔

다. 그녀는 눈이 깊고 피부가 유난히 깨끗하다. 뾰족하

게 솟은 콧날,적갈색 머리 염색으로 인하여 아직 겉으

로 보기엔 물좋은 삼십대 후반이다. 게다가 아내는 마

른 미역처럼 홀쭉한 체 에 검은테 안경까지 받쳐 준

덕분에 약간은 지적인 풍모도 엿보였다.

일순 아내에 대해 묘한 연민의 정이 묻어났다. 가난

하고 거친 삼형제 중 맏며느리가 되어 시아버지 없는

뇌졸증의 시어머니를 군말 없이 십 년이나 뒷바라지한

그녀 였다. 아마도 아내가 보통사람이 었더라면 세 명의

올케와 형제들의 무관심에 홀로 시어머니를 받들면서

속이 문드러졌을 터 였다. 그런데도 운전기사는 아내를

지적이면서도 정감있는 가정과 선생님의 이미지로 읽

어주지 않았는가. 아내는 운전기사의 호의적인 말에 감

격한 눈치였다.

십팔 년 전이다. 그녀와 승구는 모 제약회사에서 만

났다. 그녀는 영업부의 말단 직원이었고,그는 자재창

고의 신참 계원이었다. 그녀는 여상(女商) 출신이었고,

삼형제 중 맏딸이었다. 도시 노동자인 아버지의 월급으

로 비교적 단란하게 살아가는 가정이었다. 충청도 농촌

줄신인 승구로서는 아내가 분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자신을 비관하던 중에

승구를 만났다. 그녀의 희망은 시골에 내려가 목장을

경영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무슨 유행가 가사같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 을 짓는……. 아내는

불완전한 이상주의자였다. 푸른 초원. 흰 구름이 머무

는 구릉,평화로이 풀을 뜯는 소와 양 떼,그리고 회초리

를 든 소년과 소몰이 진돗개…….

그런 낭만적인 아내의 꿈을 승구는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고향에 농사지을 만한 전답과 임야가 있었지

만,그곳은 그에게 금기의 구역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내몰리듯 떠난 고향이었다. 어린

시절의 일이었지만 치욕적인 기억으로 승구의 뇌리 속

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고향이란

존재를 지워버 렸고,고향에 관련된 모든 일들이 자신과

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했다. 사

실,고향에서 벌어진 그 모든 일들은 그의 웃대의 책임

이지 그가 죗값을 치러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정

신적인 연좌제라고 해야 할까,죄인의 자식으로서 고향

땅에 발을 들여놓을 염치가 없었다.

그런데 벌이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하여 삶의 막다

른 골목에 내몰리게 되자,숭구는 어쩔 수 없이 귀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털

터리로서 새로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곳은,고

향밖에 없었다. 한번도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고향의 전답과 임야가 그나마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

루가 되어 있었다.

승구는 제약회사의 적은 봉급으로는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일찌감치 사표를 내고 의료기 관

련 사업을 벌였다. 제약회사 자재를 담당하면서 알게

된 그쪽 방면의 연줄을 발판 삼아 벌인 사업이었다. 납

품할 곳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이 년을 조금

넘어선 시점에서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두 손 들고

말았다. 월급쟁이 생활로 간신히 마련한 아파트를 처분

하여 사업을 시작했던 터인데 은행 빚과 사채 때문에

그나마 살고 있던 전셋집마저 내놓고 사글세를 살아야

할 처지로 급락하고 말았다. 아내나 승구나 이렇다 할

전문적인 기술이 없다 보니 마땅한 일거리가 잡히지 않

았다. 그는 막노동판에서 ‘노가다’ 로 일 년을 보냈다.

그의 사촌형은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승구는

그 사촌형을 찾아가 취직을 부탁했고,그가 사외 이사

(社가 S事)로 있는 젓가락 공장에 추천하여 겨우 영업사

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받는 월급으로는 자라나

는 두 아이의 교육비를 충당하기에도 힘에 버거웠다.

안되겠다 싶었던지 아내가 식당에 나가 서빙 일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월 오십만 원이라는 목돈이 보태졌

다. 적잖은 돈이었지만,점점 늘어나는 두 아이와 사교

육비를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승구는 아내의 노고와 아이들의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진급을 해야 했다. 그래야 부양수당과

직책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열심히 뛰

었고,또 신용 있게 처신했다. 피나는 노력 덕분에 드디

어 삼백여 개의 거래처 식당을 개발하였다. 여기다 86

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특수를 맞아 나무젓가락

은호황을 누렸다.

회사는 큰 공장도 짓고,유통업으로도 진출하면서 나

날이 성장했다. 그는 과장으로 승진했다. 희망적이었

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90년대로 접어들면서 ‘환경

운동’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그동안 사용되었던 나무

젓가락이 쇠젓가락으로 대체되었다. 비싼 수입 목재의

원가와 동남아의 나무젓가락 덤핑 판매로 회사는 적자

에 허덕 이다가 마침내 부도를 내고 말았다.

승구는 또다시 이 년이란 세월을 떠돌이로 생활했다.

여기다 IMF마저 터져서 그는 최악의 처지에 다다랐다.

혹독한 시련이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그 좋아하던 담

배도 끊었다. 견디다 못한 승구는 마침내 귀향을 결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전기사는 대흥면 소재지로 들어서면서 속도를 줄

였다. 도로 폭이 좁은데다가 지난 장맛비로 군데군데

파인 신작로는 국도라는 말이 창피할 지경아었다.

“자녀들 교육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 시골로 오

시는 용기가 차암 부럽습네다.”

“용기요? 무슨 용기…… 죽지 못해 오는 거지요. 우

리 작은애는 고3이고,큰애는 대학교 1년생입니다.”

그가 탄식 섞어 코웃음을 치자,운전기사는 민망해

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모로 돌렸다.

“그래도 돌아가 갈아 부칠 땅뙈기가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네요. 나도 새끼덜 교육이 끝나면 시굴에 가서

살려고 궁리하고 있어요. 실랩니다만 사장님 댁엔 논밭

이 얼마나 됩니까?’

“이럭저럭 아마도사천 평은 될 겁니다.”

“사천 평이라,엇따,이제 보니 큰 부자시네요.”

그는 마지못해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임야(林野) 삼만 평이 그의 몫이었다. 그렇지

만 그것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종산(宗미)이었다. 그

땅이 선조들의 묘지를 품고 있어서 돈으로 환산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농촌으로 가시면 IMF 실직으로 귀농한 사람들

에게 주는 귀농자 정착 지원금도 펑펑 준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요?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군요.

설령 준다 해두 지렁이 오줌 정도가 아닐까요?”

“아닙니다. 설마 대한민국 정부가 그런 거짓말은 안

헐 거유. 암튼 사장님 오늘 한턱 크게 내셔야겠네요.”

운전기사는 도착지가 가까워오자 점점 말이 많아졌

다. 사장이란 호칭만 해도 그렇다. 예사로 하는 말이라

그냥 흘려들으면 그만이기는 하지만,뭘 노리고 있는

듯한 그의 어투가 승구는 거북하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

었다. 약정 금액 외에 팁을 얼마나 주어야 할까,그는 슬

그머니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어느 새 두 시간이 지났는데,운전기사는 그동안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마침

주유소와 휴게소가 함께 붙어 있는 곳이 시야에 들어

왔다. 승구는 그쪽을 가리키며 잠시 쉬어가자고 제안

했다.

“그러잖아도 기름을 넣어야 할 참인데,잘 됐군요.”

트럭은 휘어진 길을 벗어나 넓은 주유소 광장으로 들

어섰다. 축제 전야제이기나 한 듯 여러 개의 붉은 깃발

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소.”

승구는조수석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어 아내가그

의 어깨를 짚고 내 렸다. 그들이 가야 할 목적지는 2킬로

남짓 남아 있었다. 이제 엎드리면 코 닿을 지척이었다.

주유소 광장 한쪽에는 시골답지 않게 뷔페식당이 어

정쩡하게 들어서 있었다. 봉오리 진 개나리 숲 바로 옆

에는 ‘서울 노래방’ 이란 붉은 아크릴 간판이 이정표처

럼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유럽풍의 풍차가

세워져 있고,넓은 잔디밭 저쪽에는 향천 커피샵’ 이란

간판이 보였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와 물 묻은 손을 휴지로 닦고 서

있을 때였다. 좀 남루해 보이는 옷차림의 노인이 앞으

로 다가왔다.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고개를 들

어 승구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볼에 오디만한 점이 박

힌 스포츠형 머리의 늙은이었다. 그 얼굴이 낯설지 않

았다. 어디선 본 얼굴인가 생각을 가다듬다가 승구는

깜짝 놀랐다.

“아……

바로 방앗간 집 꼴머슴 갑준 씨였다. 굴참나무 밑동

처럼 단단하고 힘이 센 그는 마을의 역사(거士)였다. 그

래서 별명이 기차 화통 아니었던가. 대충 아흔 살은 넘

었을 텐테,젊었을 적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매

년 마을 씨름판뿐만 아니라 읍내에서 벌어지는 씨름판

까지 휩쓸어,어린 그에게 강렬하게 인식된 마을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아직도 그 건강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짧은 백발은 마치 밀가

루를 뒤집어 쓴 것같이 정오의 햇살을 받아 은사시처럼

빛났다. 그 갑준 씨가 어부렁한 부엉이 같이 눈을 연신

껌벅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대주나무 집 준샘이 ? 아니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노인은 긴가민가하다가 승구를 다시 한번 자세히 훑

어보았다.

“…… 으흠,자네 혹시 춘샘이 아들 아닌가? 판 박아

놓은 듯이 꼭 닮았서리……

잠시 뜸을 들이더니 노인은 승구의 정곡을 찔렀다.

노인의 기억력은나이에 비해 대단한 것이었다. 고향에

안착하기까지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통과의 례가 있으

리라고 승구는 이미 각오한 바였다. 단지 시기가 예상

외로 너무 빨랐다는 것뿐이 었다.

“그렇습니다만……

승구는 속내를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

럼 눈을 크게 떠 보였다.

“…… 나 갑준일세. 자네 어르신하고 동갑이지. 삿갓

말 기차 화통이라면 알겠는가? 방앗간 집 머심살이 하

던 갑준이……. 피는 못 속인다고,참말로 옛말 치고 틀

리는 법이 없단 말이야.”

노인은 다시 승구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것이

었다.

“미처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그는 노인의 시선을 피할 겸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

사했다.

“자네는 다식판처럼 자네 아부지를 쏙 빼다 박았구

먼. 그래 이름은뭔가. 어릴 적엔 알고 있었는데……

“천승구입니다.”

“아,그래. 그랬던 것 같네. 어쩐 일인가? 다니러 오는

길인가?’

“아닙니다. 여기 눌러 살려고 이사오는 길입니다”

그는 힘주어 말했다.

“예서 산다구? 그기 무슨 말인가? 자네 어르신이 그

놈덜 공산당 앞잡이로 춘샘이가…… 덕만 어미 역

말댁을…….”

노인이 띄엄띄엄 내뱉는 단어들의 의미를 조합하며

그는 순간 불화로를 뒤집어쓴 것처럼 얼굴이 후끈 달아

올랐다.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 고향

에 얼마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무려 오십여 년 저편

과거의 일이기에 그들의 기억에서도 어느 정도 퇴색됐

으리라 믿었다. 노인의 정정한 기억력 때문에 과거라는

아픈 괴물이 고개를 쳐들고 불쑥 눈앞에 나타난 것이

다. 고향 땅을 밟기도 전에 그가 두려워하던 어떤 것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승구는 불안한 마음이 들

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춘삼이었다.

‘모두가 고르게 잘 살아가는 세상을 창조하자’ 는 남

로당 조직책의 회유에 그만 그의 아버지는 입당 원서에

서명을 했다고 할머니가 은밀하게 귓속말로 전해 준 비

밀...

6 • 25 전쟁이 발발하자,아버지는 면단위 인민위원장

직을 맡았다. 면사무소는 인민군에게 접수되었고 젊은

부면장은 종적을 감추었다. 부면장의 아내를 닥달하러

간 아버지가 수수밭에서 겁탈했다. 부면장 아내는 그

길로 우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어버 렸다.

국군이 인천에 상륙했을 때,아버지는 미처 북상하지

못했다. 방앗간 골방에 숨어 지내면서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의 아버지는 시래기처럼 구겨진 절망 속에

서 가까이 지내던 동지에게 기별을 보냈다. 물론 도움

을 요청하는 편지였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라는 연

락이 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시는 아무 연락이 없

었다. 고목나무 삭정이 속에 머리 처박은 꿩은 꼬리가

잡힌다고,안되겠다 싶어진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친구

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밀고로 이어

졌다. 체포당한 아버지는 대장간이 있는 쇠전 마당에서

총살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는 할머니가 어린

그에게 이불 속에서 들려주었다.

이제 오십여 년이란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으려니 생각했으나,그것은 그의 오산이었다.

갑준 씨를 만나다니,화승총을 조준받은 사냥감 신세인

것을 그는 알았다. 그는 아직 아내와 아들 형제에게도

아버지의 과거를 고백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무덤 속

으로 가져가야 할 비밀이었다. 그런데 갑준 씨를 만나

다니,뻣속이저려왔다.

“경섭이라고…… 저 목수하던 밤골의 증씨 손자 말이

여. 자네도 알껴. 그 사람두 어제 이사왔어. 예서 살겠

다고. 근디 말이지,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공장 열었다

가 망해 먹고,남의 돈도 떼먹고,야밤에 식구덜 데리고

올디 갈디 움써서 고향으로 도망쳐 왔다구 쑤군거리더

구먼. 그네덜한티는 내 말 못 들은 것으로 허게나.”

갑준 씨는 목안에 그르렁거 리던 가래를 시멘트 바닥

에 거칠게 뱉어내고는 다시 말했다.

“이게 우리 둘째아들 주유소야. 여기서 살려면 기름

보일러를 써야 할 텐디,기왕이면 우리 아들 주유소 기

름을 쓰게나. 손바닥만한 동네에 판매소가 네 개야. 이

리와 봐.”

그는 노인을 따라갔다. 노인은 주머니 에서 쇳대를 끄

집어내더니,주유소에 딸린 창고 문을 열었다. 거기에

는 휴지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노인은 휴지

박스 하나를 가슴에 안고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이사를 했으니 잘 살라고 주는 게야. 자네 아부지도

그 부 면장 댁 사건만 아니었으면 참 존 위인이었는

데……

노인은 그의 심중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덕담을

한다고 한마디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는 퀘퀘한 닭똥

냄새가 배인 듯한 휴지 박스를 건네받으며 등줄기가 섬

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뛰고 두 다리가 자꾸 허

둥거렸다.

“여보……

그를 부르는 아내의 음성이 아득했다.

안성댁은 입안이 깔깔했다. 눈꺼풀은 성냥개비로 괴

인 듯 뻣뻣했다. 이따금 눈앞이 어질어질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녀는 수백 번이나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그

러나 자식이 떠날 날이 막상 다가오니 가슴이 무너져내

리는 것만 같았다. 혼자 사는 것에 어지간히 익숙해진

안성댁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허전해지는 것은 어

쩔 수가 없었다.

까악까악.

벼락을 맞아 벌겋게 죽어간 대추나무 가지 위로 까마

귀 떼가 날아들고 있었다. 저눔의 까마귀들…… 사람이

죽거나 마을에 불길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까마귀 소리

가 천지를 진동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까마귀 떼를 향

해 매서운 눈총을 주다가 마침내는 밭둑에서 돌 하나를

집어 휘이 던졌다. 이눔의 까마귀들…… 하필이면 아들

의 이삿날 아침에 저리 야단을 떤담. 그녀는 훠이훠이

종주먹을 날렸다.

지금이 몇 시인가.

안성댁은 시간이 궁금해졌다. 철대문 안으로 들어섰

다. 사랑채 여물솥 옆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열두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착 예정 시간은 열한 시라고 들었다. 왜 이리 늦을

까. 아들과 며느리는 어미를 마치 끈 없는 뒤웅박을 팽

개치는 것처럼 눈앞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또 어디로 갔는가. 안성댁은 마당으로 내려섰다. 마당

끝에 서면 냇둑 옆으로 일자로 쭉 뻗은 시멘트 포장 농

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농로 위로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크.”

안성댁은 신음 아닌 비명을 내뱉으면서 마당가에 그

만 주저앉고 말았다. 승구네 이삿짐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사실에 안성댁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

는 심장도 벌렁벌렁 뛰었다.

아들 수영이 함께 대처로 나가 살자고 달포 전

까지 권유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손사래를 내저었다.

수영이가 제놈 아들 형제의 대학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

라가 식당업을 하겠다고 일 년 전부터 어지간히 설쳐댔

다. 그 바람에 황소 두 마리도 끌어냈고,누에 뽕잎 갉아

먹듯 논밭도 야금야금 팔아먹었다. 전문대학까지 나와

농민후계자로 끄덕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아들 형

제의 장래를 위해 서울로 떠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아들이다. 인물도 인물이지만 영특하고 뚝심도 있어 가

문의 장손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선대로부터 물

려받은 가대(家位)를 헐값에 팔아치우고…….

안성댁은 죽은 조상들과 마주치는 꿈을 밤마다 꾸었

지만 자식놈은 그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가진 게 움써 호강은 시켜드리진 못하지만 저희와

함께 도시로 나가 손에 흙 묻히지 마시고 편히 사시는

게 장땡이유. 이젠 이 자식놈 말도들으세요,엄니.”

미안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안성댁은 뻔히 읽고 있

었지만 귓맛은 새로웠다. 하지만 다 늙은 노인네가 북

통만한 집 에서 손자들과 초엽하게 어 떻게 산단 말인가.

상상만으로도 껍껍해 입 안에 침이 말랐다.

“싫다. 서울이 아니라 서울 할아비라도 싫다. 지금껏

이 선산의 묘지와 땅덩이두 그렇지만,열다섯에 시집와

서 느이 아부지와 함께 밟고 매만지던 논밭을 두고 이

제 죽을 나이에 무슨 호강을 허것다구 우렁이 속 같은

고향을 두고 떠나냐. 마침 느이 이종사촌 승구가 여기

와서 산다니까 우선은 등 기대구 의지헐 테니 그리 알

고 내 걱정은 접어둬라. 산 입에 거미줄 칠 일도움쑤니

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입안에는 게거품이 부글부글 끓

었다. 안성댁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르는 슬픔을 가까

스로 억눌렀다.

“엄니 생각이 정 쇠고집 부리먼 할 수가 웁지유.”

수영은 미 련을 접고 단념하는 눈치 였다. 그래도 홀어

머니에 대한 애석함이 마음 한편에 걸리는 것 같았다.

“혹여,내가 여기 살다가 밥숟가락 놓는 날이 되먼 느

아부지 묘지 옆댕이 뜯어내구 거기 함께 묻어 주거라.”

“잘 알았슈. 원대로 할테닝께로……

안성댁은 백정에게 끌려가는 황소 모양의 수영이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대처 생활이란 비단옷 입고 달밤

에 산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성댁도 익히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눈 감으면 코 베어 먹는다는 말이 생

겼을까.

“엄니,인저 새옷으로 갈아 입으시라구……

또 그런소릴……

안성댁은 수영의 얼굴을 짯짯이 훑어보다가 혀를 찼

다. 자신은 평생을 허름한 입성으로 살아왔다. 나이 삼

십 후반에 청상이 되었지만 세상 숨은 남편에겐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이 면구스러웠다. 이웃 사람들에게도 그

것이 마치 도리인 양 처신했다. 오죽하면 자신이 듣지

않는 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굴뚝 강아자 라고 했을까.

남루한 옷 때문에 붙은 별명인 줄 잘 알고 있었다.

 

노쇠한 늙은이일수록 입성이 깨끗해야 한다는 사실

을 안성댁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것이

싫었다. 오히려 남편을 숨긴 생과부로서 자신의 절망과

체념을 덕지덕지 달고 사는 게 마음 편했다.

“엄니,내가 떠나는 날 울지 마슈. 우시면 난 그 모습

안 볼래유. 글구 애어멈이 한복 맞추어 드린다카니 두

눈 꼭 감구 입으시구유.”

 

수영이 논을 팔아 수중에 잔금을 쥐던 날,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자 안성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느이 아부지가 웁는 시상을……. 여직까지 육십여

년이나 너덜대는 옷가지 걸친 신세였는데,인저 누굴

보라구 지는 석양 무렵에 새 것 입고 서성이겠느냐. 그

런 속내 있으면 돈으로나 주지 않고……

 

옆구리 찔러 절 받기라고,안성댁은 며느리한테 약간

의 돈을 받아내어 챙겼지만 마음은 한없이 쓸쓸했다.

증조부,시아버지,그리고 남편이 이어받은 땅뙈기를

자식이 팔아 넘겨 받은 돈이라고 생각하니 목에 준치

가시처 럼 걸리고 말았다.

 

농사꾼이 농사체를 팔아 버리는 것은 땅을 배신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제 남아 있는 것이란 달랑 집

한 채와 앞마당,채소밭이 전부였다. 금싸라기보다 소

중했던 손자와 아들,며느리가 이제 대처로 떠나는가

싶어 가슴이 메었다. 그러나 그게 다 손자들의 장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엄니,여기서 뭐 해유?’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수영이 코먹은 소리로 말했다.

“이삿짐 차 왔다. 곧 들이닥칠 텐데 실을 준비는 다

되았지?’

 

“그러믄요.”

수영은 안성댁의 눈이 젖어 있는것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떠날 사람,남을 사람이 이미 정해

진 이상 어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라나는 자식

을 위해서는 고향을 떠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엄니,손자새끼덜과 헤어지는 게 섭섭치유?’

“걸 말해 뭐하겼냐.”

 

안성댁은 탄식하면서 고개를 모로 꼬았다.

마 당 입 구 에 서 클 랙 션 소 리 가 가 볍 게 울 렸 다 . 짐 을

가득 실은 트럭이 드디어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흙먼지

가 일 면 서 황 토 냄 새 가 진동했다. 짚더미 삭은 냄새도

왈칵 코에 스며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며느리와 손자가

우 르 르 달 려 나 왔 다 . 멈춰 선 트럭 조수석에서 승구가

뛰어내렸다.

“이모님……

그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고상했다. 조카 며느리도 잘 있었제?’

안성댁은 승구 아내의 붕붕한 오리털 파카 어깨를 정

겹게 토닥였다 . 이제 자신은 이들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 신세였다. 이종 조카라지만 서로가 정 붙이면 가까

운 형제보다 더 살갑게도 느껴지는 법 아닌가.

“이모님,여전하시네요.”

“자네들 덕분이네.”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이삿짐 트럭 주변으로 모여들

었다. 환갑을 지낸 노년들이 대부분이었다. 미운 정 고

운 정 섞여 있지만 막상 고향 떠난다는데 이삿짐을 거

드는 모습이 고맙고 대 견했다.

“승구 씨,귀향을 환영합니다. 행복하게 잘 살으시오.”

나이키 모자를 눌러 쓴 쉰다섯 살쯤의 사내가 양초

뭉치가 든비닐빽을 승구에게 불쑥 내밀었다.콩멍석에

서 뒹굴은 듯 얼금얼금한 얼굴에다 곱슬머리의 사내였

다 . 승구는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자,안성댁이 소태 씹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여.”

 

“그 사람이라니요……

“저시기 옛날 전쟁 때 부면장 댁 셋째 자제분이시여.

지금 이장 일을 보구 계시는 장덕만 씨라고….”

승구는순간 가슴이 벌렁거렸다. 세상이 변해서 그렇

지 , 그와 승구의 만남은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격이 아닌가.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승구가 허를 찔린 기분이었지만 능청스레 웃음을 지

으 면 서 공 손 히 허 리 를 꺾 었 다 . 부 면 장 댁 셋 째 아 들 과

갑준 씨의 등장은 승구에게 약 오른 가랫롯처 럼 거북스

러운존재 였다.

“반갑습니다.”

그 는 마음씨 좋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농사꾼

답 지 않게 곱고 부드러웠다. 음지에서 펜대 잡다가 자

신처럼 고향으로 찾아온 귀향민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

다. 그러나 그가 이장을 맡고 있다니,승구 자신과는 좀

다른 처지일 것도 같았다.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고……

 

승구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

었다. 껍껍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비슷한 나이로 가까이

어울릴 수 있는 처지인 것이 분명했다. 이제 오십여 년

이 지난 아버지의 과거를 승구가 그에게 사죄한들 그가

가볍게 용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마

을 이장 장덕만이 의례적이든 아니든,이사를 돕고 축

원한다는 것은 한켠 고맙고 불안한 일이기도 했다. 사

자가 무서운 것은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음이 아니

겠는가. 덕만이가 어머니를 잃은 그 보복의 칼날을 지

금도 갈고 있다면……? 껍껍하고도 답답한 일이다. 승

구는 IMF 경제 질곡에서 벗어나 농촌에서 자유롭게 살

고 싶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찾아

서 하고 싶었다.

“이제는 짐을 또 실어야 헙니다.”

운전기사는 마을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어조로 수

영이네 이삿짐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낡은 옷장과 폐선(廢

船)에 가까운 냉장고와 세탁기와 같은 전기 기구는 제외하였

으니 당연히 서울로 향하는 수영이네 이사짐은 단촐했다.

 

오는 손님네 짐을 내려놓은 마을 사람들은 내친 김에 떠나

는 수영이네 이삿짐까지 트럭 위로 밀어 올렸다. 트럭에 올

려지는 짐을 눈여겨 살피던 안성댁은 문득 들고양이마냥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삿짐 사이에서 자신이 시집온 이후부터

내내 사용해 왔던 화로와 놋대야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가볍고 단단한 물건이라서 며느리가 탐을 내어 안성댁의 승

낙도 받지 않고쑤셔 넣은 짓거리임을 간파할수가 있었다.

“그건 이리 내려놔.”

안성댁은 화로와 놋대야를 끄집어 내면서 땡고함을

질렀다.

“엄니,그것 내가 쓸려고……

수영이 바람 빠진 공 같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 이건 안돼 … … 안성댁은 아들한테 빼앗길세라 구

닥다리 화로와 대야를 겹쳐 가슴에 끌어안았다.

“어차피 엄니 돌아가시면 지가쓸건디……

수영이 인절미 훔쳐 먹고 입 씻는 벙어리모양 어색하

게 서 있다가 안성댁 등뒤에 대고 노여운 눈길을 보냈

다. 그게 무슨 값이 나가는 물건도 아니잖은가. 세월의

 

버케가 앉은 쇠붙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안성댁으

로서는 이보다 더 소중한 물건이 없었다. 시집 와서 겨

울이면 따뜻한 아랫목에서 남편에게 건넬 된장 뚝배기

를 그 화로에 얹었다. 그리고 남편의 정겨운 손발을 담

갔던 추억 어린 놋대야였다.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늬 아부지께서……

안성댁은 적의 어린 눈빛으로 비맞은 장닭같이 서

있는 며느리를 흘겨보았다. 괘찜하고 철딱서니 없는 것

들…… 가져 갈 게 따로 있지,이걸 허락도 없이 가져 람

맘을 먹다니,안성댁은 또다시 고함을 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어머님,그것덜 지들 주세요. 식당 문 앞에 장식용으

로 놔 두면 안성맞춤일 틴데유.”

며느리는 어깃장을 놓는 듯이 이죽거 렸다.

“내가 숟가락 놓으면 그때나 가져가거라. 내 살아생

전에는 어 림도 없다.”

그러는 사이 에 이삿짐은 트럭으로 다 올려졌다. 운전

기사의 익숙한 솜씨로 밧줄도 날줄 씨줄로 단단히 옭매

여졌다.

 

“어무니,그럼 우린 떠날랍니다.”

수영이 돌아서서 안성댁을 향해 허리를 꺾었다. 자식

도 가까이 있어야 효자가 된다. 이제 각각 떨어져 살게

되면 아들도 스님 바랑 속의 빗같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자식도 품안의 자식,부모를 부양해야 그게 올바

른 자 식 아 닌가. 마침내 트럭이 겔겔겔 둔탁한 시동을

걸 자 안성댁은 눈물이 왈칵 눈앞을 가렸다. 아들은 가

고 이종 조카 승구가 왔다. 오는 자,가는 자의 눈길이

제 각각 두려움과 기대로 교차되고 있었다.

 

승구는 이삿짐을 늦도록 정리했다. 뒤늦게 잠자리에

들 었 지 만 자 리 가 바 뀐 탓 인 지 두 눈 이 말 똥 말 똥 잠 이

쉬이 오지 않았다. 앞으로의 영농 계획도 이것저것 궁

리했다. 농사 잘 짓고 수익도 올려야 한다. 형제 아이들

 

의 학비가 만만치가 않다. 더구나 어떻게 된 셈인지 대

학생의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어떻게든

어 려운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할 처지 였다. 그는 한동안

불면으로 뒤척이다가 바깥마당으로 나왔다. 마침 열아

흐레 이즈러진 달이 중천에 외롭게 떠 있었다.

달빛속에 붉은 페인트칠을 한양 철지붕이 뒤웅박

몇 개 엎어 놓은 듯한 부드러운 뒷산과는 어딘지 조화

롭지 못하다고 느꼈다. 우렁 속 같은 마을에 들어앉은

여덟 가구가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하나같이 초가지

붕이었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이니 뭐니 하는 바람을

타면서 파랑,빨강,연두색 지붕으로 변해 버 렸다. 승구

네 집은 기와집에 담장이 길고 별채인 사랑채 하나가

안마당을 등지고 좌정하고 있었다. 얼른 보기 에는 나름

대로 종갓집 위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달빛이 쏟아지는 장독대 뒤꼍에서 댓잎들이 소슬하

게 살을 부비고 있었다,그는 댓잎의 은밀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당가 연못에서 첨벙,하는 소

리가 들렸다. 어둠 속의 물비늘이 달빛에 물살을 이루

 

고 지나갔다 . 허기진 물오리가 먹이를 내리찍는 소리

같았다. 그때 도둑고양이도 지나다가 첨벙,소리에 놀

라 기겁을 하면서 대숲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오동나무 등걸에 오줌을 내깔겼다. 한기를 느끼

곤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녹

초가 되어 골아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푸푸 코를 골면

서 고단한 잠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승구는 아내 곁에

누울까 망설 이다가 그만 사랑방으로 건너갔다. 대숲의

소슬한 바람소리가 왠지 으스스한 느낌 이 들었다. 개를

두어 마리 사다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막 잠이 들려는 참이었다. 창문에 검은 그림자가 어

른거리는 것 같았다 . 이밤중에 누굴까 . 내가 잘못 본

것일까. 그는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음직

이는 발자국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방문이 왈칵 열리

면서 검은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하나도 아니고 셋이었

다. 승구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누,누구요?’

“이 새끼,네가 도망치면 돈 떼먹고 잘 살 줄 알았냐?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개새끼야.”

그들은 다짜고짜 승구를 주먹으로 갈기고 발길질로

제압했다. 승구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거꾸러지고 말

았다.

“보세요. 도대체 왜 이러시죠?’

“너 정경섭이 맞지?’

“네?’

“이새끼야. 네가 정경섭이잖아.”

사람을 잘못알고 일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그들

은 흔히 말하는 ‘해결사’ 인 것 같았다.

“나정경섭이 아닙니다.”

“너,정말로 경섭이 아녀?’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군유.”

“거짓말 마 새끼야. 거짓말이면 이걸 팍……

사내는 손에 든 식칼을 쳐들어 보였다.

“당신들 큰 실수를 한 겁니다. 멀쩡한 사람을 이렇게

구타부터 하는 법이 어딨소.”

그러자 턱이 길고 머리통이 유난히 큰 사내가 잠시

 

난감한 얼굴로 승구를 내 려다보았다.

“니가 정말 정경섭 이가 아니라고?’

“아닙니다. 나는 정경섭이가 아니고 천승구라는 사

람입니다.”

승구는 또 고개를 가로저 었다.

“그럼하나만물어 보자.”

“너 어제 이 마을로 이사온 놈 맞지?’

“어제가 아니고 오늘이죠.”

“너 황해금속 사장놈 맞지? 황해금속 정경섭 사장 말

이야.”

“나는 황해금속이 어떤 회사인지도 모릅니다. 그리

고 나는 사장도 아니구요.”

몸집 이 조금 뚱뚱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야,늬들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정경섭 이가 아니라

잖아.”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개새끼들,뭐해. 튀어!”

 

세 사내는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그들이 도망치는

발자국 소리를 승구는 어 렴풋이 들었다. 그때서야 겨우

잠이 깬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진 아빠,무,무슨 일이에요?’

“여보……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는가. 승구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끙끙 앓는 소리에 놀란 아내

가 서둘러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남편을 발견한 그녀는 비명 섞인 고함을 몇 번이나 되

풀이했다. 여덟 가구 이웃들이 잠결에 승구 아내의 비

명을 듣고 모두들 놀란 얼굴로 나타났다. 안성댁은 경

찰에 신고를 했고 오래잖아 경찰 순찰차가 들이닥쳤

다. 승구는 그 소동을 띄엄띄엄 진술했다.

“알겠습니다. 조직 폭력배들 소행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승구를 위로했다.

“이만하기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

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119 구조대가 올 겁니다. 병원

에 가셔서 치료 받으십시오.”

 

경섭 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승구

와 함 께 원 거 리 통 학 을 했 던 동 창 생 이 다 . 부 지 런 함 과

신실함이 몸에 밴 그였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그는 안

산에 있는 금속공장에 취직을 했다. 소규모의 중소기업

이라고 했다. 그는 그곳에서 십 년간 내 회사처럼 일을

열심히 해서 직책이 상무이사까지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그가 회사를 인수하여 사장직을 맡았다는 소문

이 나돌았다. 부도 위기의 공장을 맡아 이년만에 극적

으로 살려냈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위기

가 닥쳐왔다. IM F 한파였다. 노임 지불이 어려웠을 것

이고,대출금 이자 압박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그런 경섭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시골로 도망친 것

이 분명했다

 

덕만은 식전에 외양간에서 쇠시랑으로 찍어낸 두엄

을 경운기에 싣고 들로 나갔다. 지난가을 무서리 속에

서 김장 배추를 뽑아낸 밭에다 두엄을 질퍽질퍽 펼쳐놓

았다. 쇠오줌 냄새가 코에 진동했다. 농사꾼에게는 소

먹이 수입이 그중 괜찮았다. 그는 어미소를 스물네 마

리나 사육했다. 마리 당 오백만 원을 호가한다. 송아지

도 이백오십만원에 이른다 . 그는 지난해에 송아지를

여섯 마리나 받아냈다. 적잖은 수입 이었다.

“이장님네 배추 농사가 그랑프릴 했다는디 벌써 거름

을 내슈?’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채소전 중계인 한씨가 요토바

이를 세웠다. 그는 덕만이 두엄 펴는 밭으로 어적어적

걸어 들어왔다. 덕만이 쇠시랑질을 멈추고,노래기 삼

켜 버린 표정을 지었다. 덕만은 지난여름 천봉답 닷마

지기에 가을 감자 농사를 지었다. 풍년작이었는데 중계

인 한씨의 엄살에 속아 헐값에 그만 밭떼기로 감자를

팔아 치웠다 . 감자값이 폭락 할 것이라는 그의 충고에

그만 서둘러 팔았던 것인데 그 밭떼기를 넘기자마자

보탄듯이 감자값은 천 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중계인

한씨가 들고양이 같은 얼굴로 다가섰다.

이장님......

“고추 농사 지어 볼 생각은 없습니까? 계약 재배

“난고추안 갈을 껴.”

“왜요? 작년에 모두 죽을 쑤었으니 올해는 금값일 텐

디,계약하시먼 한밑천은 붙잡을 텐디?’

저 오뉴월 능구렁 이 속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덕만은

여전히 고개를 외로 꼬았다.

닐니리야 닐니리야 … … 그의 작업복 웃주머니에서

핸드폰 가락이 가볍게 울렸다. 덕만은 보란 듯이 최신

형 디지털 핸드폰을 펼쳐 귀에다 댔다.

“저예요……

핸드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흘러나왔다.

“저라니요?’

“이이는,이제 마누라 목소리도 모르시는가 봐? 나요,

나. 이장님 사모님……

외나무다리에서 I 55

오늘 따라 아내의 음색이 무척 곱다고 느껴졌다.

“이 예편네야,주책 떨지 말어. 어서 용건만 말혀 봐,

옆에 호랭이 가죽 베끼는 손님 있어.”

“아버님이 찾으시는데요,당신을……

“아부지가?’

“지청구 얻어먹을 일이 있나 봐요.”

“지청구라니,내가 무슨?’

나이가 아흔이나 되었는데도 집안 대소사는 물론이

고 하다못해 치약 고르는 것까지 곰 맞게 참견을 한

다.

아마도 덕만의 기억으로는 6 •25 전쟁 때 어머니가

자결한 뒤부터 그랬던 것 같다.

“어서 올라와 보시우. 괜히 천장 무너지는 소리 나기

전에……

“알았어!”

덕만은 핸드폰을 닫았다. 아무리 장사꾼이라고는 하

지만 같은 마을의 농작물 값을 헐값으로 주무르는 놈이

고 보면 다시는 상대하지 말아야 할 도적놈이라고 그는

일찌감치 점찍고 있었다.

“딴 데 가서 알아보더라구. 나는 고추 농사 포기했으

니께.”

덕만은 눈꼬리 에 시퍼 런 칼을 꽂고 돌아섰다.

덕만은 얼음 풀린 마당배미 에다 경운기를 세웠다. 사

랑채 앞에서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는 건조한 소리를

내는 양창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 담뱃대를 빡빡

빨 아 대 던 그 의 아 버지는 서슬이 퍼렇게 날이 선 채 들

어오는 덕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느이 어멈이 무엇 땜에 죽었는지 아냐?’

“그건 갑자기 왜요?’

“왜라니? 이 자숙아,니가 무슨 성인군자 똥구녁으로

나온 눔이냐?’

“무슨 말씀이신데유?’

덕만은 도통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네가정 몰러서 묻는 소린겨?’

“이 자슥아,네가 어제 승구란 눔네에 뭐,불꽃처럼

일어나라구 양촐 사다가 바쳤다매? 네가 정신이 온전한

눔이 여? 그눔은 우리 집 식구덜 웬수이 여 ! 웬수눔이 왔

는디두 가화만사성,입춘대길 하라구 뭘 갖다 바쳐? 어

서 그것 도로 찾아와. 내 눈깔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웬수 새끼 아들눔은 용서할 쑤움 써 . 내말 알아 듣것

냐?’

“아버지두 차암…… 그기 언제 적 얘긴데……

“뭐가어째?’

“용서하시지유. 알고 보면 불쌍한 자숙이유. 승구가

직접 그런 것두 아니구.”

“뭣여? 이 쑹맥아,느덜 예수당에 불이 나게 댕기더니

만 이제 예수 수제자 났구나. 예수 믿는 것도 그 따위 예

수라면 당장 거둬들여 용서할 눔덜을 용서해 야 그게

참된 용서지,아,그 천하에 베락맞을 죽을 눔이 살아왔

는디 그걸 살려 두면 우리가 죽게 되는겨. 어여,그 가이

새끼덜 한티 내가 살려 준 게 후회 막심이라구 일러두

라구. 너,내 새끼라먼 내 말 들어서 그자들 내 밭두렁

논두렁길로도 댕기지 말라구 혀. 알았어? 어서 가서 어

제 가져다 준 양촛불 되찾아다 내 앞에다 놓으라구. 어

서 나가 봐.’,

덕만은 난감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뜻을 거 역한 적

이 없었다. 매사를 순종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승구네와는 철천지 원수

로 지내야 한다는 엄 명 이다. 물론 아버지로서는 승구네

에 대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한이 사무친 것은 당

연하다. 그러나 덕만은 정작 오늘 새벽 교회에 나가 승

구와의 관계 회복을 주선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시작했다.

“산 목숨 하나 끊기 전에 내 말 명심혀. 세상사는 뿌

린 대로 거두고 심은 대루 거두는 게 이칭겨. 대숲 안집

춘샘 이 새끼 덜 하군 눈빛조차 마주보면 안 되 여 !”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말끝마다 복수요 , 원수였다 .

그는 어정쩡한 덕만의 태도에 미심쩍어 하는 눈치였다.

그는 사실 6 •2 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크게 입신

할 사람이었다. 일본에 건너가 신학문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주역을 비롯하여 사서삼경을 훤히 꿰고 있

었다. 성격도 활달하고 인물도 언변도 다 갖추었다. 머

리가 영특하여 장차 군수 영감이 될 재목감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그러다가 전쟁을 만났고,아내

를 잃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는 사람을 미워하고 불신

했다. 대소사를 막론하고 눈에 거슬리거나 도덕 윤리에

어긋나는 자를 만나면 모조리 ‘가이새끼들’ 이라고 역

정을 퍼부었다.

덕만이 주기도 문을 외우면서 두엄 더미로 나서는데

박 목사가 성경책을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새벽 기도

를 오래 하고 이제사 나오는 길인 것 같았다.

“장 집사님,두엄 치셨나요?’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목쉰 음성이었다.

“할렐루야! 목사님,어딜 가시나유?’

“장 집사님 뵈울라구요.”

“저를요?’

“예.”

“무슨 일루……?’

“저기 저 집,천승구 씨네 댁에 가서 이사 예배를 드

리면 좋겠는데,열한 시쯤이면 되겠지요?’

“아,네에……

덕만은 엉겁결에 머리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

고 박 목사의 말인데,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또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난해

부활절에 신앙생활 십 년만에 안수집사로 취임했다. 교

회의 안수집사로,마을의 이장으로 늘 분주한 나날이었

지만 그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것

이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엄명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엄명이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은 용

서와 화해의 길이었다.

“어라,목사님 오셨네유. 목사님도 들어오시지유.”

덕만의 처가 대문 밖으로 삐끔 목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저는 집에 가서 먹어야지요.”

그는 다시 한번 열한 시에 만나 승구네 집에 가서 이

사 예배를 드리도록 하자고 말하고,돌담집 장독대를

외돌아 사택으로 사라졌다. 개 짖는 소리가 사납게 들

려왔다.

“목사님 이 이사 예배 드리자고 말씀하셨어유?’

“아녀,아녀……

덕만이 눈짓을 하면서 오른손 검지를 입으로 가져갔

다. 아버지에게는 비밀이라는 신호였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면 가만 있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

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온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2, 법은 멀고

 

승구는 답답했다. 어혈진 몸을 풀기 위해 아내가 한

약을 지어 날랐지만,몸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병

원 출입도 잦았고,약도 삽교천 줄남생이처럼 날이 갈

수록 종류가 늘어만 갔다. 지니고 왔던 영농자금 이백

만 원은 문둥이 눈썹 내려앉듯 벌써 흔적도 없었다. 병

이 도적이란 말이 새삼 실감났다.

그러나 그는 우황 든 소 앓듯이 마냥 누워 지낼 수만

은 없는 형편이었다. 굴삭기를 끌어들여 밤나무 구덩이

법은 멀고 I 65

를 파야 했다. 이르면 5년차 늦으면 6년차 결실이란다.

그 방면에 이력이 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밤

나무는 부가가치가 다른 과수에 비해 매우 높았다. 이

런 지식을 왜 진작 조사하지 못했던가 싶을 정도였다.

예배가 끝나자 성도 여덟 명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

다. 덕만과 목사만 남아 있었다. 목사는 승구의 영농 계

획을 구체적으로 물이왔다. 목사는 마침 농고(農高) 출

신이었다. 그는 원예과 출신답게 성도들에게 자상하고

세밀하게 농사짓는 기술과 요령을 보급해 왔다.

“영농 자금은 얼마나 지참하셨어유?’

승구는 대답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내놓고 말하

기 부끄러울 정도로 정말 몇 푼 안 되는 돈이었다. 그

러나 묻는 말을 끝까지 묵살해 버리기도 난감한 노릇

이었다.

“산을 담보로 해서 농협 대출을 좀 받아볼 작정 입니

다.”

“그래요?’

“네.”

“집사님이 좀도와주시지요.”

목사의 말에 덕만은 펄쩍 뛰듯이 말했다.

“그거 쉽지 않을텐데유?’

“집사님이 나서면 안 될 일이 어딨습니까.”

목사는 웃으면서 말했고,덕만은 고개를 끄덕 였다.

“지가 알아는 보겠습니다.”

그는 산야의 담보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과 대출 담보

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목돈을 마련할 수는 없을 것이라

고설명했다.

‘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마련될 겁니다만……

승구로서는 코끝이 시큰하도록 덕만이 고마웠다. 그

가 자신을 함정으로 몰아갈 원수는 아닌 게 분명했다.

게다가 덕만이는 안수집사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땅거미 내릴 무렵에 읍내 농

협에 다녀온 덕만이 헛기침을 하면서 대문 안으로 들어

섰다.

“대출금은 역시 몇 푼안돼유.”

“네 에.”

“그런디,그 산에 있는 소나무 400주를 사겠다는 작

자가나타났는디,워찌 생각하시는지?’

“소나무를 사다니유?’

“관상수라나 뭐라나 혀서 요즘 도시에서는 그런 소나

무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구 그러는디요.”

승구는 내심 아차 싶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

까. 그 사신 조경 공사판에 잡역부로 쫓아다닌 경험이

있었다. 소나무가 관상수로 인기 높다는 것을 그는 새

삼 깨달았다.

그러나 호락호락 해치울 일이 아니었다.

“그런디 그게……

그 산에는 조상들이 줄줄이 누워 있었다. 줄잡아 삼

사십 년은 넘어섰을 소나무를 솎아 낸다는 것이 마음이

걸렸다. 게다가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내야 할 일이어서

자칫하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었다.

“내가 계산해 봤는디,20점짜리 1주 당 이만 원씩 계

산해도 400주면 팔백만 원이야. 약간의 복구비는 별도

로 예치를 시키더라도,드문드문 밤나무를 식재하면 누

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닌가벼. 내가 소개하니,따로 소

개비를 낼 일도 없고…… 잘 생각해 보시우.”

10년생이나 15년생 소나무가 주로 상품성이 있다고

덕만은 말했다. 옮기기도 좋고 파내는 것도 덜 힘이 든

다는 설명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400주만 솎아 낸

다?

“허나 허가받기가 까다롭지 않을까요?’

“그야 묶인 노끈 풀기보다 어려울 수도 있지요. 허지

만 담당자들한테 초를 잘 치면 안 될 일도 없지요.”

“그럴까유?’

“이제 보니 천형은 도시 사람 다 됐군요. 너무 겁먹지

마시우.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는 게 농촌 일 아니겠습니

까.”

그렇다. 십팔 년간의 도시생활 탓에 농촌에 대한 식

견이라는 것이 이제는 청맹과니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께 오늘 잘 연구해 보시우. 이 참에 목돈 만들

어서 그걸로 영농자금도 하고,거기다 밤나무를 심으먼

일석 이조니께. 소나무 사겠다는 작자가 나타났을 때,

기회 놓치지 마시우. 이것도 워찜 주님의 뜻일런지 모

르지우.”

덕만이 돌아가자,그의 아내가 무릎을 치면서 소나무

솎아내는 일에 적극 찬성이었다.

“그런디 그게 종산(宗山)이잖아.”

“종산은 무슨 종산이우. 다 당신 앞에 놓인 재산이

지.”

“등기부야 내 이름이지만 내용으로 봐선 종산이지.

할아버지,할머니,삼촌묘소가줄줄이 누워 계시잖아.”

“아따,죽으면 그만이지 종산은 무슨 종산이우? 그리

고 무슨 베슬 쪼까리나 했다면야 백 년 이백 년 길이 놔

두겠지먼 솔직히 말해 그런 조상도 아니잖수. 그 흔해

빠진 대핵교를 가르치길 했나,손자 새끼 덜한테 학비라

도 남겨 준 조상 하나 없지 않우? 그까짓 소나무,임자

있을 때 처분허시우. 이 런 때나 우리도 그 잘난 조상 덕

좀 봅시다.”

숭구는 아내에게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뒷산 소

나무가 돈이 된다는 사실은 일단 구미에 맞는 일이었

다. 이것을 팔아 농사비용과 가용에 활용한다면 좋은

일 아닌가. 그러나 염치 없기로는 선무당 쌀자루보다 더

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처한 상황과 처지가 다르

다. 그래서 염주도 제 몫몫이요, 쇠뿔도 각각이라는 말

이 생겨났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승구는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소나무를 팔아서 이 어려움을 극복해본다? 생각만 해

도 은근히 신바람이 났다. 종산을 팔거나 땅덩이를 통

째로 팔아먹는 것도 아니고,겨우 소나무 400주를 솎아

낼 뿐이다. 생각해 보면 코끼리 코에 비스켓에 지나지

않는 것처 럼 느껴졌다. 게다가 소나무 솎아낸 자리 에다

밤나무를 심는 일이니,이장 덕만이 말처럼 알 먹고 꿩

먹는 일 아닌가.

승구는 머리맡에 놓인 숭늉 그릇을 들어 꿀떡꿀떡 마

시곤 밖으로 나갔다. 어양천 냇둑에는 쥐불놀이

가 한창이었다. 우거진 덤불과 갈대가 툭탁거리면서 활

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이 마치 뱀의 긴 헛바닥같이

널름거리고 있었다. 간간이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목청

도 바람결에 묻어 왔다. 승구는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

으로 침묵하는 기왓골을 올려다보면서 두어 번 잔기침

을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집은 임진왜란 전에 지은

기와집으로 서해안 내포 지방에서 몇 안 되는 문화재급

건축물이었다. 문화재로 지정을 받게 되면 재산 가치가

떨어진다고 삼촌이 길길이 반대하여 오늘에 이른 집이

었다. 이 집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을 치장하고 손질하는 것이 모두가 돈이고 시간이었

다. 하루 벌어 하루 살던 승구에게 문화재급에 속하는

기와집. 그것은 얼음판에 나자빠진 황소처 럼 눈알만 멀

뚱거리면서 바라보아야 하는,그림의 떡이었다. 삼촌

말처 럼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그까짓 문화재급이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그런 호사는 돈이 많아 주체를

못하는 사람들이나 누릴 일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 살기 위해서는 아쉰대로 수리와

개축을 해야 했다. 적막하던 집도 굴뚝에 연기 나고 외

양간에 송아지 요령이 쩔렁대니 한결 사람 사는 것 같

았다. 숭숭 뚫린 방문에 새 창호지를 바르고 외등이 마

당채를 밝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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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6_F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