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일제 강점 초기 항거했던 수당 이남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下>
‘홍주성 전투’선봉장 참여
기사입력: 2015/07/27 [10:04]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의병이란 다른 민족이 침략했을 때 나라를 위해 싸우는 민중을 말한다. 역사가 중에는 1895년 의병에서부터논의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1907년 해아사건이 있은 후 군대 해산이 있어 구 한국군인들이 일어나 서울·원주·강화 일대의 의병들과 합세해서 항쟁하게 된 때를 주시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주목돼야 할 것은 일본의 침략기구로서의 통감부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다. 이때 일본 제국주의 침략방지에 대해 최초로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항쟁을 벌인 의병은 충청도 홍주성(현재 홍성)에 근거를두고 싸운 의병이다. 일본 사령부에서 내놓은 책을 보면, 그전투에선 자기네들이 크게 손해 본 것을 되도록 감추려고 애쓰고, 또 되도록 축소하려고 하지만, 이미 서울에는 고문 경찰부가 설치돼 있었다. 이 고문 경찰부에서는 홍주성으로 군대를 배치했고, 경찰과헌병도 보냈다. 홍주 부근이나 공주는 물론 수원에서까지 보냈다. 그 때의 일본 기록에는 약 30여 명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5,6명씩 갔다고 한다. 이 때 일본군경들의 무기는 물론 우리 의병들의 무기보다 월등하게 우세했다. 의병은 구식 총인데 그들은 벌써 서양 총을 좀 더 좋게 개량해 갖고 있었다. 모젤 권총도 있었다. 그 상당수를 일병들이 갖고 있었다. 의병들은 창과 구식 총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일본 사람들은 홍주성 전투에 대해 의병들이 가장 규모 있고 강력하게 저항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네들이 끌고간 병력보다 홍주성에 집결된 의병 부대의병력이 우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일본인들이 의병을 과소평가하기 위해서써놓은 기록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일제 때의‘조선 경찰관 순직사’에 의하면 홍주성 전투에 참가했던 동원(桐原)이란 순사가 겪었던 일이 적혀 있다. 앞서 말한 사령부에서 낸 보고에는 홍주성에는 사람이 얼마 없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의병들이 들어가니까 남문에서 저항하면서 북문으로 도망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때 일본 사람으로 홍주성에 와 살던 사람도 몇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홍주성전투에 대한일본사령부보고에는 대체로 5월20일에서 28일까지로 전투가 끝난 것으로 돼 있으나 동원(桐原)의수기에는 아마 제일 전투가 심했던 날은27일 (일요일)이었던 것 같다. 사령부 보고에도‘토벌지’에서는 27일의 전투는 빼어버리고27일은‘소우(小雨)’라 써놓았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안 될 것은 일진회원에 대해서이다. 우리의병 전투사를 항쟁사로 볼 때 일진회원을빼 놓고 보아서는 결코 안 된다. 사령부 보고에는 홍주성 전투에서 일진회원을 앞세우고 전투를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않았다. 그러나 일본 경찰 기록에 의하면 일진회원이 홍주뿐 아니라 홍주 주변 각 군(郡)으로 퍼져서 별의별 짓을 다 했다 한다. 일진회원들은 농민들을 치고 빼앗고했다는 것이다. 홍주성 전투는 이렇게 끝났지만, 일본 군경들은 7월 초 까지 머물러 있었고, 의병은 잡히거나 도망쳤지만계속해서 항쟁을 벌였다. 일본 사람들의기록에 보면 경기도 동남 지역까지 의병의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전라도순창 태인에서는 최익현을 중심으로 한의병이 일어났다. 이는 바로 홍주성 전투를 준비할 때 그쪽으로 연락했기 때문인 것이다. 당시 홍주성에서 싸우던 의병들이 100% 괴멸을 당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모두 흩어진 후 다른 지역에서 계속 항쟁을 했다. 분산해서 항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되자 다시 재거할 논의를 하게된다. 이 때 수당이 일본 군경에게 잡히게 됐는데, 일진회원들이 냄새를 맡고는 왜군경에게 밀고해 습격한 것이다. 원호처에서 나온‘의병 항쟁사 자료집’둘째권‘이용규’에 나와있다.본래 구한국군인은 1907년 이후에 서로 협력을 해서 싸우는데, 이미 이 때 우리 한국군이 의병 속에 들어갔음을 알 수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군수라든지 군관의 밑에서 심부름하는 사람까지 의병에 협력을 했다. 그 때 협력한 것이 발각돼 일본 헌병들이 서울로 압송했던 일이꽤 많다. 이것으로 추산할 때 홍주성 전투는 대규모 항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전투의 기록상으로는 선봉장으로수당이 참여를 했다고 했다. 그 후 다시 재 거사를 위해서 논의하다가 왜군경에게잡혀서 학살을 당했다. 이 때일본 경찰들은 수당 부자에게 민종식의 거처를 물었다. 그러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망치로 치니 골이 깨어지고, 이가 모두 부러지고,몸이 모두 터졌다. 여기서 아주 악형을 당했다. 수당의 아들은 이때 왜경들이 매질을하자 혀를 깨물어 끊었다. 그렇게까지 참혹하게 왜놈들의 악형을 받으면서 항쟁을했다. 왜경들은 수당 부자를온양으로 끌고 가다가 중간에서 회유를 시도했으나 순응하지 않자 부자를 참살한 것이었다. 고귀한 선생의 정신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지 않으면 안된다. 예산/김영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