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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

일제 강점 초기 항거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일제 강점 초기 항거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조선과 왕에 대한 충정의 삶
기사입력: 2015/08/03 [09:38]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면암 최익현 선생은 1833년 12월5일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했다. 면암은 6세때 한학에 입문, 14세 때 화서 이항노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았고, 그때‘면암’이라는 아호를 하사 받았다. 23세(1855.3) 명경과순통 합격 급제해 30세 신창 현감 인으로 임명돼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변암은 수 차례 관직에서 사직하려는 상소를 올림으로 개인의 영달을 죄 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장래, 일본인들의 궁내 출입과 국내 각종 정책들에 관여하는 모양에 환별을 느끼고 그에 대한 경계의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 간신들이 일본인들과결탁해 있었던 터라 그는 관직을 제수 받고도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그러다가 끝내 당시 오지였던 청양으로 이사해 의병들의 모임 장소가 될 만큼, 그곳에서의병 모임의중심 역할을 했다. 분명 임금과 신하가 존재했던 시기였지만, 일제와 간신들이 가득했던 당시 관료 사회에서 더 이상관료로서의역할을 수행할 수 없음의 한계를 인식. 의병을 모으고, 교육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청양이다. 그 후 1905년 11월 그의 나이 73세에 홍주 의병의 총수로 추대 돼 실질적으로 홍주 의병을 지휘했다. 그때, 의병대장으로는 민종식, 곽한일, 남국진 등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홍주 구백의 총에 합장 됐다. 이듬해인 1906년 4월 13일 그의 나이74세에 전북 태안에서 의병총수도 의병을 모아 봉기 했으며 6월 27일 친일 세력과 일본에 의해 의병이 해산되고 일본 사령부에 구치 됐다. 그리고 그해 7월일 일본 대마도 위수령 경비대에 수감됐다. 그는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주는 쌀 한톨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으로 항거했다. 끝내 그해 11월8일 단식으로 순국 하셨다.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맺은 각종 조약, 매국노들의 독세에 몸을 던져 나라를구하려던 선생의 뜻은 결국 이루지 못했다. 면암 선생 사후 일제는 한반도를 완전히 점령하고, 식민지로서의 수탈을 꾀하는데 뜻을 이루기 시작했다. 댐의 둑이 처음에는 작은 생쥐 굴 하나로 붕괴가 시작되는 것처럼, 침략 지배의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온 일본인들의 의지를 매번 항의하고 상소를 올려 경계하기를 일렀으나 그의 충절은 그때마다 무시되고, 마침내 국권마저 상실되는 한심한 지경에 이르게 됐다. 그가 남긴 상소문과 조선 백성들에게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글들을 보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일제의 경제 수탈 의욕에 대한 대책으로‘시폐사조 상소’를 올렸으며 강제로 화친 조약인 것처럼 위장한 조약에 대해서‘오불가척화의소’도끼를 목에 두른, 그야말로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의정부찬성’으로 임명 되었을 때 올린‘사무 12조항 상소’또한 궁과 백성이 모두 지켜야 할 계몽하고 실천해야 할‘실사구시’의 상소였다. 74세에‘격문’을 작성해 백성들에게호소한 내용 또한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몸부림 이었다. 그 외‘창의소’‘포고팔도사민’등이 있고, 특히 면암이 74세에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한 죄를 그들에게 항의하고, 경고하는 글‘기 일본정부서’를 남겼다. 대마도에 수감 중 단식으로 기력이 약해져‘임병찬’이 받아 쓴‘유소’는 고종에게 고한 마지막충정의 상소가 됐다.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쇄락해진 국권에 실망하지 말고,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간신들의 아첨을 멀리하고 자주체제를 굳건히 하라는 마지막 충성의 편지였다. 이렇듯 면암의 삶은 조선과 왕에 대한 충정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전국에 산재한 40여 곳에 이르는 그의 유적들은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기도하다.    예산/김영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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