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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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 충청지도부 김한종 집안 중심 구성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일제 강점 초기 항거했던 김한종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下>
기사입력: 2015/07/13 [09:42]  최종편집: ⓒ 내포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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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종은 충청지도부를 확대하기 위해 친분이 있었던 장두환(농민, 대한 광복회 선전부장)을 가입 시켰으며, 그와함께 회원 모집을 시도했다. 김한종의 대한 광복회 충청지도부는 대부분 홍주의병에 참여했거나 내포문화권에 속하는 지역 인물들을 중심으로구성됐다. 특히, 김한종 의사의 집안을중심으로 예산 광시 신흥리 사람들이 대거 참여 했다. 당시 대한광복회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먼저 지역을 분할해 충남지역의자산가를 파악했는데, 김한종은 서산, 예산, 홍성, 보령 지역을 맡았다. 그 과정에서 군자금 모금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에게 신고하는 악질 친일파들이 있었다. 김한종은 그 중에서 도고면장 박용하를 시범적으로 다음과 같은이유로 처단하기로했다. “도고면장박용하는 통고문을 받고 이것을 헌병대에게건네주었을 뿐만 아니라, 박은 다시 부하면서기 가족을 거지와 같이 만들고 전 면장을 옥사시킨 악인이므로, 대한 광복회를 찬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연금을낼 리가 없으므로 이 자를 죽여서 그 밖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해야 한다.”
박용하의 처단은 김한종이 장두환에게 말하자 장두환이 김경태에게 실행을지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17년 12월 김경태는 임봉주(일명임세규)와 함께 도고 성문영의 집에서 사형선고문에 박용하의 이름을 기입한 후 박용하의 집에 도착했다. 박용하는 의연금을 내겠으니 시간을달라고 했으나 결국 처단됐다. 김한종은 채기중(대한광복단창립)과상의했고, 채기중, 유창순, 강필순 등 3명이 처단을 실항했다. 이러한 대한 광복회 충청지도부의 강력한 활동은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됐고, 결국 배신자 이종국의 밀고로 조직이발각돼 핵심인물들이 1918년 1월에 거의체포됐다. 이때 체포당한 37명중 24명이충청도지부원이었다. 체포된 인물 중에서는 충청도지부원인 김한종, 김경태, 유창순, 장두환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김경태는 경성에서 사형이 집행됐으나 유창순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10년, 장두환은 7년형으로 감형됐다. 김한종과 박상진은 상고했지만 역시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이로써 대한광복회와 충청지도부는 그 기반을 거의 상실했지만, 1918년 이후에도 체포되지 않은 인물과옥고를 차리고 나온 인물들을 중심으로 명맥이 이어졌다. 청양 출신으로 전라도에서 활동한 한훈을 비롯해 우재룡, 권영만, 윤병일, 정태복 등의 의해 상해 임시정부 및 암살단, 대동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하면서 1920년까지 대한광복의 이름으로 활동이 지속됐다. 이후 광복결사대, 주비단, 유교부식회 등 다른단체들이 조직되면서 대한 광복회의 정신과 투쟁 방식이 계승됐다. 한편 김한종의 사당은 마을 외곽 민가와 접해있다. 그의 사당에 이르는 길은안내판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길안내 기기의 도움이 없으면 찾아가는 길이수월하지 않았다.     예산/김영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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